한국 축구가 40년 만에 다시 멕시코 땅을 밟았다. 2026년 월드컵 본선 진출로 11번째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대한민국 대표팀. 그 여정의 시작점이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태극마크를 달았던 전설적인 선수를 만났다.
현재 한국OB축구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선수 시대 국가대표로 113경기를 뛰었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한국 축구의 산증인이다. 강원 FC에서 전력강화실장으로 활동하다 올해부터 축구 원로들의 모임인 OB축구회 수장을 맡게 된 그를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 사무실에서 만났다.
“1977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단체입니다.” 그는 OB축구회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길 때까지 단체를 잘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이곳을 멘토링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요. 축구는 우리의 목표였고 동반자였습니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역할이든 하겠습니다.”
사무실 벽면에는 역대 월드컵에 출전했던 대한민국 선수단의 단체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그는 선수, 감독, 행정가로서 각각의 대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축구에 기여해왔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겠다는 OB축구회의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이번 월드컵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선수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했던 대회의 개최지와 똑같기 때문이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다시 나가는 무대였어요. 모든 게 새로웠습니다. 긴장 속에서 정신없이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지었다. “지금처럼 풍족한 지원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죠. 선수 22명에 감독, 코치, 의무팀, 매니저가 각각 딱 한 명씩만 동행했으니까요. 그래도 세계 무대에서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설레었습니다.”
올해 대회의 주요 화제 중 하나는 고지대 경기다. 대표팀의 조별 리그 3경기 중 2경기가 해발 1570미터의 과달라하라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표팀은 미리 미국 유타주에서 비슷한 환경의 캠프를 진행했다.
“우리 때도 비슷했어요. 월드컵을 앞두고 독일에서 1차 훈련을 하고, 미국 콜로라도 고지대에서 적응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실제 경기 때 고지대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첫 월드컵이라 정신없이 뛰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당시 그는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장으로 있었다. 일부 경기가 고지대에서 열려 선수단의 적응을 돕기 위한 환경을 조성했다. “스포츠 연구소의 조언을 받아 파주 센터 한쪽에 산소 결핍 공간을 만들었어요. 선수들이 하루 30분씩이라도 그 공간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심리적으로라도 도움이 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32년 만의 도전이었던 1986년 대회에서 한국은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와 같은 조에 속해 1무 2패를 기록했다. 강팀들과의 격차를 실감하면서도 처음으로 승점을 따냈다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당시 상대했던 전설적인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를 떠올렸다. “그 시절엔 맨투맨 수비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쓰였어요. 우리도 맨투맨을 시도했지만 마라도나가 그렇게 쉽게 막히는 선수인가요.”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전하다가 허정무 전 감독을 마라도나에게 붙였는데 효과가 있었어요. 당연히 거칠게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현지에서 ‘태권도 축구’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40년이 흐른 지금, 그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바라보며 감회가 새롭다고 말한다. “흔들릴 때도 있었고 여러 말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분명히 많은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는 단 한 승도 거두지 못하던 팀에서 높은 목표를 바라보는 팀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첫 시작은 프로 리그 출범이라고 봅니다. 1983년 리그가 만들어지면서 선수들이 오직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어요. 그 이후로 리그도 성장했고, 환경과 선수들의 기량 등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국내에 프로 리그가 없던 시절, 그는 드물게 미국 무대에 진출한 경험이 있다. 메이저리그사커 출범 이전 북미사커리그가 운영되던 때였다. 포틀랜드와 시카고 팀에서 뛰며 올팀에 선정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차범근 선배가 독일에 진출했고, 일부 선배들이 홍콩에서 뛰기도 했어요. 저도 의지는 있었지만 수비수로서 유럽 진출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외국인 선수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는 미국이 축구 붐을 일으키려고 외국인을 많이 영입하던 시기에 40일간의 테스트를 거쳐 포틀랜드에 입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그는 환경의 차이를 크게 느꼈다. 한국에서는 발목 테이프를 빨아서 재사용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도 똑같이 했더니 핀잔을 들었어요. 알고 보니 의무팀에서 선수가 요청하면 테이핑을 해주더라고요. 재활용할 필요가 없었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리그 수준이 엄청나게 높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장비 관리, 재활, 의료 지원 같은 부분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가장 부러웠던 건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 경기를 즐기는 문화였어요.”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시스템’이다.
“축구는 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특정인에게 모든 걸 맡겨서는 안 돼요. 행정가, 지도자, 미디어, 선수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그가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행정가로 전환하면서 집중한 부분은 지도자 교육 체계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 지도자는 유명세로 자격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단계별 자격 취득 체계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어느 정도 틀은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선수들도 자격증을 따면서 미리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팬 아닐까요. 대표팀이든 프로 구단이든 경기를 지켜보는 팬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추어 무대도 향후 팬들에게 즐거움을 줄 선수를 키운다는 기본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월드컵에 나서는 선수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번 월드컵에서는 지난해까지 그와 함께 일했던 수비수 이기혁 선수가 깜짝 발탁돼 화제가 됐다. “신체 능력도 좋고 공도 잘 다루는 장점이 많은 선수입니다. 다만 수비 지역에서 위험을 초래하는 단점도 뚜렷했어요. 강원이 어렵지 않게 영입할 수 있었던 이유죠.” 그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단기간에 단점을 보완하면서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가 됐어요.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40년 전 멕시코에서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마주했던 그. 이제는 같은 땅에서 도전에 나선 후배들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10차례 가까운 월드컵 무대를 꾸준히 지켜본 그는 누구보다 후배들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부디 박수를 받으며 대회를 마무리해서 우리가 함께 지켜온 유산을 이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