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도체 호황으로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대기업들이 예금에 머물지 않고 채권시장으로 자금을 적극 이동시키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올해 들어 카드채와 은행채 등 우량 금융채에 수조 원 규모를 쏟아부으며 채권시장의 새로운 핵심 투자자로 빠르게 부상했다.
반도체 업종이 호황을 이어가면서 기업에 쌓이는 현금이 늘어났고, 안정적이면서도 예금보다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는 금융채가 기업 자금 운용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 기업이 채권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결정적 이유, ‘금리 차이’
기업이 채권에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금리 차이이다.
SK하이닉스가 최근 매수한 카드채는 모두 신용등급 AA급 이상의 우량 물량으로 발행 금리가 연 4%를 상회한다.
비씨카드는 4.285%, 신한카드는 4.275%, 하나카드는 4.274% 수준에서 발행이 이뤄졌다.
반면 대기업 법인예금 금리는 현저히 낮은 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중소기업 법인예금 금리가 3%대 중반인데, 대기업의 경우 거래 관계와 예치 규모를 반영해 2%대 후반까지 내려가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같은 금액을 예금에 묶어두느냐, 채권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수익률 격차가 연 1% 이상 벌어지는 셈이라 기업 자금을 책임진 재무 담당자들의 시선이 채권시장으로 모이고 있다.
■ 카드채만의 차별화된 강점, ‘투자자 맞춤 만기 설계’
카드채가 일반 채권과 구별되는 핵심 매력은 투자자가 원하는 시점에 맞춰 만기를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카드사는 발행 의사결정이 빨라 대규모 물량 공급이 가능하고, 자금 운용 일정에 따라 연 단위가 아닌 특정 날짜를 만기로 지정할 수 있다.
카드업계 한 관계자는 “대규모 유동성을 보유한 기업의 자금 수요와 카드채 발행 특성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며 “수천억 원 단위 자금을 운용해야 하는 대기업 입장에서는 활용도가 매우 높다”고 전했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이달 들어서만 삼성카드, 신한카드, 현대카드, 비씨카드, 우리카드 등 주요 카드사의 채권에 1000억 원에서 2000억 원 안팎을 집행하며 발 빠르게 자금을 배치했다.
■ 은행권도 부담을 느낀다, ‘수조 원 단위 자금 유입의 그림자’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 단위의 자금을 한꺼번에 예금으로 받게 되는 부담이 가중되면서 은행권도 점차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중은행 입장에서는 조달한 자금을 다시 운용할 곳을 찾아야 하는 부담이 커지고, 그만큼 마진 확보가 어려워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제시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대기업 예금 금리는 사실상 개별 협상을 거쳐 결정되는데 규모가 클수록 은행이 남기는 마진이 거의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수조 원 단위 자금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운용 부담이 그만큼 커져 은행들이 높은 금리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운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SK하이닉스가 카드채 시장에서 1조 4000억 원이 넘는 물량을 매입한 데 이어 은행채 시장에서도 꾸준히 자금을 집행하고 있어 금융권 전반의 채권 발행 체계를 변화시키는 촉매가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투자 무대 확대, 카드채에서 은행채로
SK하이닉스의 투자 행보는 카드채를 넘어 은행채 시장으로까지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
NH농협은행과 SC제일은행은 18일 SK하이닉스의 수요에 맞춰 각각 4000억 원, 2600억 원 규모의 은행채를 발행했다.
발행 금리는 농협은행이 4.03%, SC제일은행이 4.06% 수준이며, 두 채권 모두 만기를 2029년 4월 3일로 동일하게 설정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연 단위나 반기 단위가 아닌 SK하이닉스가 원하는 특정 날짜를 만기로 지정한 사례로, 은행권도 투자자 맞춤 발행 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시장에서는 최근 은행권이 카드 업계와 유사한 발행 문화를 빠르게 수용하면서 채권시장 전반의 경쟁 구조가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 투자 성향에도 변화, 단기물에서 2~3년물로 무게중심 이동
SK하이닉스의 투자 성향 자체에도 뚜렷한 변화가 관측된다.
과거에는 기업어음(CP)이나 1년 이하 단기 여전채 위주로 자금을 운용하며 유동성 확보에만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만기 2~3년의 중장기 채권까지 투자 범위를 적극 확대하고 있다.
한 증권사 채권 담당자는 “SK하이닉스가 과거에는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단기물 위주로 움직였지만 최근에는 만기를 2028년, 2029년까지 점차 늘려가고 있다”며 “단순 대기성 자금 운용을 떠나 수익률까지 함께 고려한 능동적 투자 전략으로 명확히 전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단순히 현금을 예금에 묶어두던 방식에서 벗어나, 안정성과 수익성, 만기 유연성까지 모두 확보할 수 있는 금융채 중심의 자산 배분이 대기업 자금 운용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이다.
■ 시장 전망, 반도체 호황 지속 시 채권 자금은 더 늘어난다
시장 전문가들은 반도체 업종 호황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며, SK하이닉스 같은 대형 반도체企业的 보유 현금이 채권시장으로 계속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안정적이면서 연 4% 수준의 수익률을 갖추고, 투자자 일정에 맞춰 만기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는 금융채가 대기업 자금 운용의 새로운 표준 모델로 빠르게 정착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특히 AA급 이상의 우량 카드를 중심으로 한 금융채 시장은 대형 기업 자금 유입을 기반으로 발행 규모와 금리 모두 한 단계 도약할 가능성이 높아, 향후 채권시장의 투자 흐름 자체를 좌우할 변수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